[낙태, 죄와 벌 ①]"병원 4곳 낙태 거절해, 실직하고 해외 도피까지"
[편집자주] 대한민국에서 신체건장한 여성의 낙태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낙태는 현행법 위반이다. 하지만 출산 역시 선택하기 어려운 답이다. 특히 미혼 여성은 낙인이 찍혀 사회 밖으로 내몰리는 분위기다. 장기 공백을 마무리하고 완전체를 이룬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여부 판단을 앞두고 있다. 머니투데이는 낙태죄 이슈와 직결되는 미혼모 문제를 조명해 사법부의 판단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우리 사회 현실을 짚어봤다.
"지금은 아이가 참 예뻐요. 하지만 다시 시간을 3년 전으로 돌릴 수 있다면…. 낙태를 선택할 거예요."
2015년 봄, 누구보다 평범했던 6년차 유치원 교사 지영씨(34, 가명)의 세상은 암흑같이 깜깜했다. 갑작스러운 임신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지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궁 속 혹', '삶의 오점'을 떼어내기 위해 지영씨는 산부인과 3곳을 돌아다녔다. 울면서 애원했지만 의사들은 "돈을 벌며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나이"라며 수술을 거부했다.
임신 3개월 차까지 산부인과를 전전하던 지영씨는 마지막 병원에서 "보호자를 데려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수술 예약을 하고 이를 남자친구에게 얘기했다. "알겠다"던 남자친구는 수술비가 180만원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연락을 끊었다.
'합의된 낙태'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지영씨는 떠밀리듯 출산을 결정했다.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입덧이 한창이던 지영씨가 직장에 임신 사실을 알리자 유치원 원장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분과는 같이 갈 수 없다"며 사실상 해고를 통보했다. 원장은 "노무사에게 상담해보니 (사직 권고가) 문제 없다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막막해진 지영씨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해외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았다.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 후에야 엄마에게 임신을 고백할 용기가 생겼다. 전화 너머로 임신 소식을 접한 엄마는 아이를 지우라며 한 달 내내 지영씨를 들볶았다. 미혼모 가정에서 자랐다던 먼 친척의 고생담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도 낳았다.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없었지만 기초생활수급비를 신청해 매달 100만원 정도의 국가 지원을 타낼 수 있었다. 교사 때 모아뒀던 돈에, 여기저기 융통한 돈을 긁어모아 임대주택 보증금 1500만원을 구했다. 근근이 의식주를 해결했다.
그러나 나홀로 육아는 어려웠다. 한 번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봐줄 사람이 없어 아이를 안고 병원에 입원했다. 수유 때문에 약도 못 먹었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혼자서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다 아이와 같이 펑펑 울었다.
지영씨는 "최근에야 숨통이 좀 트였다"고 말했다. 딸 사진을 보내도 묵묵부답이던 아이 아빠는 요새 들어 띄엄띄엄 양육비를 보내주고 있다. 아주 가끔 돌보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시간제 아르바이트도 한다.
지영씨는 앞으로가 걱정이다. 일은 하고 싶지만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 고정 수입이 잡히면 수급비도 받을 수 없다. 일을 하게 되면 주택에 들어가는 돈과 각종 이자, 돌봄 서비스 이용료를 본인 수입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낳은 게 제 선택이 아니었듯, 지우려는 것도 제 선택이 아니었어요. 미혼모를 '아웃사이더'로 몰아가고 양육 책임은 모두 부모에게 전가되는 사회에서 무작정 낳는 것만이 능사인가요?"
지영씨의 사례에서 보듯 미혼모는 육아와 일의 양립이 힘들뿐더러 각종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여성(16~44세) 2006명 중 70%가량이 "임신과 낙태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걱정이나 두려움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낙태를 실제 했거나 낙태를 고려한 적이 있는 응답자는 593명(29.6%)이었다. 이들에게 낙태 사유를 물었더니 경제적 준비가 되지 않아서가 29.7%로 가장 높았고 학업과 일을 해야 해서가 20.2%로 뒤를 이었다. 낙태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가정 시 55.4%는 "다시 낙태를 선택하겠다"고 응답했다.
연구진은 "낙태를 고려했으나 실제로는 하지 않은(못한) 171명의 과반 이상은 임신을 유지하면서 하던 일/학업, 꿈을 포기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미혼모에 대한 인식·제도 개선이 선행되지 않은 채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주홍글씨를 새긴 여성만 양산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체 가구 중 한부모가족, 동거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지만 법률혼을 중심으로 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아직 자리잡고 있다"며 "차별 없는 제도를 만들고 어떤 형태의 가족이라도 아이와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